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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내 머릿속 지우개가 내 일이 되다

by 따논당상 2021. 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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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친구 미선이는 갱년기를 갓 넘은 아줌마다. 후안무치한 남편의 외도로 피 터지게 싸우다가 얼마전 이혼하였다. 이젠 대학을 다니는 아들과 단둘이 오붓하니 살맛나게 지낸다. 그녀는 내노라는 대형마트 임원으로 일하면서 등쳐먹는 남편없어 오롯이 자신을 가꾸는데 공들이고 산다. 틈틈이 필라테스 운동이나 교회 모임도 활발하게 활동하는 것을 낙으로 삼고 산다.

 

쉼없이 움직이는 것은 그녀의 신조다. 평소 그녀는 "낮에 전화 받는 여자는 아프거나 돈이 없거나 성격이 못된 거라며.." 하는 말을 입에 오르 내렸다. 언제부터 인가 그녀는 내가 만나자고 하는 카톡에 답이 없더니 점차 전화통화 조차 줄었다. 그녀는 체력의 한계가 와서 점점 스트레스와 피곤함으로 나를 상대해 줄 시간도 없으려니 하고 생각했다.  

 

  하루는 그녀가 내 집으로 불쑥 나타났다. 현관문 앞에 들어선 그녀는 공허하고 쓸쓸하고 고독해 보였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한바탕 쏟을 것 같은 눈빛을 담고 있었다. 그녀는 내가 내민 따뜻한 차 한잔을 머금고 허공을 바라봤다. 한동안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난 말이야....요즘 샤워하면서 거의 매일 악소리나는 비명을 질러 대.... " 하면서 말을 꺼냈다. 그녀의 뺨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 내렸다. 

 

한평생 남편만 바라보고 살다 어깃장 무너지는 이혼도장을 찍을 때에 조차 그녀가 우는 것을 난 본 적이 없었다. 그녀가 훌쩍거리며 손으로  뺨을 닦는 동안 무안할 것 같아 티슈 몇 장을 꺼내주고 나는 눈을 살며시 돌렸다. 그녀는 연이어 "난 이 세상도 날 버린 것 같아. 이젠 모든 게 두려운 워.. 나 혼자서 싸울 자신이 없어. 평생동안 누려온 내 수족도 이젠 내 맘대로 못하다니..."하며 점점 흐느낌이 거세졌다. 

 

  "아니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갑자기 아들한테 무슨 일이 생겼어? "하며 나는 달래기 시작했다. 그녀는 머뭇거리더니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내가 매번 갑상선약 처방 받는 병원 알지? 내가 하도 요즘 이상해서 거기서 검사를 했는데....내가 혼합성 치매래...."하며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요즘 피로가 쌓이고 짜증이 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병원을 찾아갔다고 한다.

 

최근 그녀는 VIP고객한테 거래처로부터 주문을 받고 보내야 할 상품들의 목록을 어디에 두었는지 기억이 안나 한참 헤매기가 일쑤였다고 한다.그녀의 성실성을 인정받는 터라 처음에는 직장 동료들이그러려니 했지만 이제는 같이 일할 수 없는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고 한다.

 

그녀가 말하는 여러 변명은 이제 통하지 않는다고 한다. 오랫동안 다니던 직장도 그만두어야 할지 모른다는 위기감에 휩싸여 두렵다고 한다. 내 밥줄이 끊어지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하다고 한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직장에서 쫓겨나기 전에 도망치듯 나와버릴까 하는 결심도 해보았다고 한다. 그녀의 고민은 깊어만 갔으나 나 한테 속에 있던 앙금을 연신 쏟아내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고 한다. 

 

  "별일 아닐 거야. 나도 출근할 때 차를 주차장 어느 곳에 두었는지를 잘 기억하지 못하고 헤매는 데...." 하며 그녀를 위로해주었다. 

 

  그날 이후 한동안 심각한 상황에 처한 내 친구 일로 내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았다. 전에 영화로 보았던 '내 머릿속 지우개'가 문뜩 떠올랐다. 거기서 여주인공이 어떻게 결말이 났는지가 생각이 안나 인터넷을 한참 뒤져보았다. 내 친구를 어떻게 지켜주어야 할지를 생각하니 막연하였다. 할 수 있는 일이란 내가 한번이라도 더 시간내서 들여다보는 것뿐이었다. 

 

  그녀는 하루가 지날수록 건망증은 심해져 직장 일도 큰 방해를 받는다고 한다. 갈 때까지 가보자는 심정으로 병원에서 처방해준 약물로 버틴다고 한다. 이젠 직장에서나 집 곳곳에 해야 할 일의 목록을 빽빽이 적어두고 확인한다고 한다. 언제부터 인가 활기차게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녀는 어깨에 한껏 힘을 주면서 "세상이 날 버려서 여태 섭섭하고 야속했는데 그래도 이를 악물고 살거야!"라고 하였다. 퇴근하는 지하철에서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아이들 교과서를 보는 모습을 보고 생각을 고쳐 먹었다고 한다. 우리는 이번 계기로 솔직한 감정을 더 털어놓게 되었다. 앞으로 네 일이 내 일이 될 수 있다며 서로 훈수를 두고 산다. 우리는 서로 도움이 되는 정보를 나눈다. 

 

고비고비산을 넘어야하는 인생길에서 

진정으로 함께 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서로에게 정말 큰 위안이 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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